미국 동부의 최고 명문 사립대학이자 최고 병원 시설을 자랑하는 존스 홉킨스 대학 및 병원의 설립과 전 재산을 기부한 존스 홉킨스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존스 홉킨스 대학교는 1876년에 설립되었으며, 현재는 미국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의학 및 연구 기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대학은 존스 홉킨스의 이름을 계승하여 그를 기리기 위한 교육과 연구를 진행하며, 의학, 공공 보건, 생명 과학, 공학, 인문학, 사회과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우수한 교육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9개의 학문 분야에 2만 4천명이 넘는 풀타임 및 파트타임 학생이 재학 중입니다. 볼티모어에 4개의 캠퍼스, 워싱턴 DC에 한 개, 볼티모어와 워싱턴 안에 여러 학교 시설이 있고, 중국과 이탈리아에도 캠퍼스가 있습니다.
존스 홉킨스는 인문 및 과학, 교육, 공학, 간호, 의학, 공중보건, 음악, 경영, 고등국제학대학 등 학부와 대학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존스 홉킨스는 의료 분야에서는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 순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존스 홉킨스의 공중보건 대학인 블룸버그 공중보건대학(Bloomberg School of Public Health)은 US News & World Report의 공중 보건 부문 랭킹이 시작된 이후로 30년 가까이 1위에 선정되는 스쿨입니다. 공중보건에서는 1994년 이후로 존스 홉킨스가 1위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아마도 2위를 확인하는 것이 더 재미있을 것 같은 랭킹입니다. 올해 랭킹에서 2위는 하버드와 노스캐롤라이나 채플힐 대학이 공동으로 차지했습니다. 또 다른 부문에서 존스 홉킨스는 공중보건대학 의학통계학과 1위, 공대의 의공학과 1위, 환경 보건과학 1위, 유행병학 1위, 보건정책 및 경영 1위를 차지했습니다.
존스 홉킨스가 사망한 1873년 당시에, 그는 퀘이커(친우회, Society of Friends) 신자이자 자녀가 없는 79세의 독신 남이었습니다. 그가 태어나고, 많은 시간을 살았던 매릴랜드 주의 볼티모어에 병원과 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당시 700만 달러를 기부하겠다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현재 소비자 물가를 반영하면, 이 금액이 1억 6880만 달러라고 하는데요. 금일 환율로 적용해 보면, 무려 2,168억 정도 됩니다. 요즘은 특정 부문의 예산도 ‘조’ 단위로 거론되는 시대라 별로 큰 단위로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만, 저 기부금으로 대학도 짓고, 병원도 지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면, 분명 어마어마한 액수가 맞을 것입니다.
기부금 700만 달러는 위키피디아에서 언급한 액수인데요. 출처 자료에 따라 몇 백만 불 차이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존스 홉킨스가 기부한 금액이 5백만 달러로 추정(The Sun, Baltimore, Thursday Morning, December 25, 1873)한다는 그 당시 신문이 있는데, 이 기사에 따르면, 이 금액의 절반을 대학교에 할당하고, 나머지는 다른 기관을 설립한 것을 비교해보면, 존스 홉킨스 대학교가 미국에서 가장 큰 기부금을 보유한 대학교라고 명시합니다. 이때, 하버드의 기부금은 2백 5십만 달러 미만이고, 뉴저지의 프린스턴 칼리지는 47만 달러를, 코넬은 48만 7천달러를 기부금으로 받았다고 서술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미국에서 가장 큰 기부금을 받은 일부 대학이라고 했습니다.
존스 홉킨스의 기부금이 주로 볼티모어 & 오하이오 철도와 볼티모어 상업 은행에서 번 돈이었는데요.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자선 기부금으로 존스 홉킨스와 같이 최고의 명문대학이 설립되었습니다. 존스 홉킨스 대학교의 설립 배경과 그를 기리기 위한 목적은 대학의 역사와 학문적인 발전에 큰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존스 홉킨스의 이름은 학교 내에서 여전히 존중과 존경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존스 홉킨스는 부유한 사업가였지만 평생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녀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하는데요. 그 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졌다면 오늘날의 존스 홉킨스 병원과 대학은 설립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일부 역사가는 추측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홉킨스 가족과 종교의 압력으로 인해 결국 사랑했던 여자와 결혼하지 못하고 평생을 혼자 살았습니다.
존스 홉킨스는 1795년에 메릴랜드주 앤 아런델 카운티에서 태어났으며, 담배 농사를 짓는 농부의 11명 자녀 중에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났지만, 가족의 재산은 그가 12세 때 크게 변했다고 합니다. 퀘이커 종교를 가진 부모님은 노예폐지주의자인 친구들의 영향을 받아 수백 명의 노예를 해방했습니다. 담배 농사를 짓는 농부가 노예를 해방시켰으니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었겠죠. 그는 일시적으로 학교에서 불려 나가 농장에서 일해야 했는데요. 17세 때, 홉킨스는 이미 농사가 자신과 같은 대가족을 부양하기에는 적당치 않다고 생각하고, 도매 식료품점을 하고 있던 아버지의 동생인 삼촌을 돕기 위해 볼티모어로 이사 갔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존스에게 너는 사업 기질이 있으니 돈이 있는 곳으로 가라고 설득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홉킨스는 상업에 능통하였고 성공적인 거래로 그 실력을 입증했다고 해요.
존스 홉킨스는 삼촌의 집에서 업무를 배우는 과정에서 자신의 사촌인 엘리자베스 홉킨스를 사랑하게 됩니다. 엘리자베스는 당시 16세였습니다. 홉킨스의 자서전 작가이자 증손녀인 헬렌 홉킨스가 말하길, 엘리자베스는 키 크고 잘 생긴 사촌을 몹시 아꼈으며, 자기 아버지가 존스에게 의존하고 있는 점, 아이들에 대한 그의 동정심과 여성에 대한 정중한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하고 어쩔 수 없는 남성성을 봤을 거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쌍방임을 확인했는지, 존스 홉킨스는 결혼 계획을 발표하게 되고요. 이것이 엘리자베스 가족에게 충격과 공포를 가져다 줍니다. 퀘이커 사회의 기준에 따르면 그들의 결혼은 혈연상, 즉, 형제 자매의 결혼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의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고 합니다.
우리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지만, 서양과 동양문화에서는 종종 사촌과의 결혼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지금은 근친혼이 유전적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도 있지만, 유럽이나 아랍 사회에서도 많이 발견되는 게 사촌간의 청혼과 결혼입니다. 종교적인 이유와 부모님의 반대로 그들은 결혼을 포기했지만 서로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게 됩니다. 이 일로 인해, 일부 역사학자들은 홉킨스가 상업에서 부를 축적하는 데 집중하면서 심장의 상처를 치유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볼티모어의 또다른 자선가인 조지 피바디는 자신보다 돈을 버는 데 더 열심인 사람을 단 한명 밖에 모른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친구 존스 홉킨스였습니다.
존스 홉킨스는 다른 여자에게 절대로 구애하지 않았고, 두 사촌지간은 평생 친구로 남았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존스가 세인트루이스에 그녀를 위해 지은 그의 집 근처에서 88살 죽을 때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홉킨스는 상업에서 부자가 되는 것에 집중하며 괴로움을 잊으려고 했습니다. 그는 은행업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성공적인 은행가가 되었습니다. 홉킨스는 볼티모어의 여러 은행의 이사로 활동하였으며, 또한 그는 볼티모어 앤드 오하이오 철도(Baltimore & Ohio Railroad)의 이사로도 활동했으며, 1857년과 1873년에는 거대한 재정 위기에서 이를 구원하기 위해 거의 100만 달러를 투자했습니다. 홉킨스는 철도 주식을 적어도 15,000주 이상 소유하였는데요. 메릴랜드 주와 볼티모어 시에선 홉킨스보다 더 많은 주식을 소유한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1873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폐렴으로 사망한 존스 홉킨스는 돈을 "인류의 선물"로 여기고 이를 "인류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아내도, 자식도 없던 그는 재산을 생존한 친척들과 그의 세 명의 하인에게 물려주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가 대학과 의과 대학을 포함한 병원을 창립하기로 한 아이디어는 어떻게 생각해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했던 증거가 있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그의 과감한 생각은 나중에 모든 학문기관의 모델이 되었고, 1867년까지 그는 미국 내에서 가장 큰 자선 기부로 알려진 700만 달러를 두 기관에 공평하게 나누기로 계획했습니다. 홉킨스는 병원에 대해 자신의 계획을 명확하게 밝혔습니다. 그는 죽기 직전에 자신의 재산을 신탁하여 대학과 병원의 설립 및 운영에 사용하도록 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쪽지를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병원은 학문적인 진보와 과학적 연구를 위해 노력할 대학과 연결된 의료 기관이어야 합니다. 환자 치료의 최고 수준을 제공하고 우수한 의사를 양성하며 의학의 발전을 위한 새로운 지식을 추구해야 합니다."
존스 홉킨스 대학의 초대 총장은 당시 45세의 Daniel Coit Gilman으로, 길만은 독일 연구 기관의 모델을기반으로 대학을 형성하고, 홉킨스를 최초의 가장 강력한 연구 대학 중에 하나로 정의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길만 홀(Gilman Hall)이 있는데, 원래는 도서관, 세미나실, 사무실이 있었다고 하고요. 지금은 존스 홉킨스 대학의 대표적인 랜드마크입니다.
존스 홉킨스의 유산은 인류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고 있고, 오늘날에도 꾸준히 놀라운 발전과 성과를 이루고 있습니다. 존스 홉킨스 대학에는 교수, 펠로우, 레지던트나 졸업생 신분으로 존스 홉킨스 소속이라고 말할 수 있는 노벨상 수상자가 29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현재 교수로 재직 하는 사람 중에는 노벨상 수상자가 네 명이 있다고 해요. 분자생물학자, 유전학자, 천체 물리학자로 학생을 가르치고, 연구를 하는 분들입니다.
국내의 매디컬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외국에서 온 의사가 능력이 출중하다는 설정인데, 백이면 백 ‘존스 홉킨스 병원’ 출신이라는 대사를 하곤 합니다. 그래서, 일반인도 존스 홉킨스 대학과 병원은 명불허전이라는 것을 은연 중에 학습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앞서 언급했지만, 존스 홉킨스가 만약 사촌인 엘리자베스와 결혼해서 자녀가 있었다면, 그가 축적한 재산이 과연 존스 홉킨스 대학과 병원 및 부속 기관과 시설들을 만드는데 쓰였을까요?
이 대답은 아마 홉킨스 자신에게 물어도 답변을 못했을 것 같습니다. 어떤 결정은 때론 충동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수십년 간 축적된 사고의 결과이기도 하니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젊었을 때 사랑에 실패했다고, 평생 독신의 삶을 선택한 존스 홉킨스도 대단하지만, 그의 사후에 친척의 방해 없이 고스란히 그의 유언대로 대학과 병원이 설립된 것도 역시 대단한 미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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